속도를 늦추니 보이기 시작한 것들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오가며 10년 가까이 달려온 뒤, 지금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이육헌 님을 만났습니다. 기록하고 나누는 일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을 이어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육헌입니다. 운영, 그로스, 서비스 기획, 채용과 조직문화, 투자 유치까지 초기 스타트업의 문제들을 두루 경험하며 해결해 온 제너럴리스트입니다. 동시에 지식과 경험을 기록하고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일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Scrap1: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건 가라앉고, 떠 있을 건 그대로 떠 있을 테니 그걸 한 번 들여다보자는 마음이었어요"
퇴사 후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꽤 오랜 시간 쉼 없이 일해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9년 반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일했어요. 특히 직전 회사인 트레바리에서 6년 반 정도 일하고 나올 때는 스스로에게 '최소 3개월은 아무 결정도 하지 말자. 대신 1년 안에는 방향을 정하자'라고 다짐했죠.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건 가라앉고, 떠 있을 건 그대로 떠 있을 테니 그걸 한 번 들여다보자'라는 마음이었어요. 그동안은 계속 뭔가를 해내려고 애쓰는 상태였던 것 같아서 이번엔 의도적으로 가라앉아보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어요.
지난 6월 말이 퇴사한 지 정확히 1년 되는 시점이었는데요. 처음엔 이력서에 1년 이상 공백이 생기면 돌아갈 길이 막히는 건 아닐지 걱정됐었는데, 막상 1년을 보내고 보니 두 가지를 느꼈어요. 첫째, '질릴 때까지 놀아도 되겠다.', 둘째, '생각보다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웃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점수를 매기고, 가중치를 두면서 다양한 방향을 탐색해 봤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출판, 콘텐츠, 미디어, 커뮤니티를 아우르는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이전 경험을 통해 '없는 시장'에서 새로운 걸 만드는 데 따르는 스트레스를 체감했던 만큼, 이제는 레거시 비즈니스에도 더 열린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지금은 출판사 등록을 마친 상태고, 관련 분야와 시장에 대한 스터디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2곳의 스타트업과 함께 그로스 컨설팅이나 서비스 초기 기획 같은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도 참여하고 있어요.
퇴사 이후 생긴 새로운 일상이나 습관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일할 때는 늘 성과에 집중하는 편이었어요. 공감보다는 결과가 우선이었죠. 그런데 퇴사 후 돌아보니,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할 때는 '기분'이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엔 논리와 성과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성과를 내려면 '상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예전엔 부엌에서 서서 프라이팬째 대충 먹곤 했는데, 퇴사 후에는 밥을 직접 해 먹고, 반찬을 접시에 예쁘게 담아 차려 먹어요. 또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청소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일상을 하나씩 챙기면서 저 자신도 잘 돌보고 있습니다.
개인 뉴스레터를 통해 꾸준히 글도 쓰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뉴스레터는 2022년쯤 시작했어요. 당시 트레바리에서 클럽장으로 독서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임에서 나온 대화들이 휘발되는 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발제문이나 책 속 구절, 하이라이트 등을 모아 아카이빙 겸 홍보용으로 처음 레터를 발행했죠. 하지만 일과 병행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한동안 쉬었다가 퇴사하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레터 주제를 독서 모임 중심에서 제 생각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바꾸고, 'SSWR(Slow and steady wins the race)'라는 이름도 붙였어요. 꾸준히 발행하기 위해 '30분 안에 한 문단만 쓰자'라고 정해뒀고, 그렇게 하다 보니 매주 일요일에 글을 모아 보내는 루틴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죠.
뉴스레터 구독자를 위한 오픈채팅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초반에는 채팅방을 활성화해 보려고 여러 실험을 했죠. 예를 들어 챗봇을 돌려 "점심 뭐 드셨어요?"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했는데,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대신 "요즘 어떤 콘텐츠 보셨어요?"라고 묻자 대화가 훨씬 활발해졌어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요즘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큰 호기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그때 나온 이야기들을 뉴스레터에 정리해 소개했더니 오픈율이 꽤 높았어요. 지금은 그 흐름을 이어 주 2회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제 에세이를 담은 'TMI'와, 오픈채팅방에서 공유된 콘텐츠를 소개하는 'WWR(What We’re Reading)' 두 코너로 구성돼 있어요.
뉴스레터 외에도 SNS 포스팅, 노션 등 여러 기록 방식을 이어가고 계신데요. 기록하는 습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트레바리를 퇴사한 뒤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하루를 기록하고, 그걸 바탕으로 주간 회고도 남기고요. 공유했던 내용 중 반응이 좋았던 것들은 다시 하나의 완결된 글로 발전시키고 있어요. 그렇게 저만의 기록 방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기록을 공유하다 보면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제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어요. 사업 준비, 재테크, 업무 몰입, 힘들었던 순간 같은 주제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보고 있구나"하고 깨닫게 되죠. 그러다 보면 "이건 나중에 꼭 글로 써봐야겠다"라는 영감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아요.

기록이라는 행위가 육헌님께 어떤 의미나 영향을 주고 있나요?
기록은 감정 정리에 큰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어떤 일 때문에 화가 나 있었는데, 저녁에 그 감정을 일기로 풀어내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지?', '혹시 내가 좀 과했나?' 하는 생각이 들고, 결국 '내일은 사과해야겠다'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하죠. 또 기록해 둔 메모를 나중에 들여다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제 감정이나 생각이 빗나가 있는 지점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반대로 '생각 잘하고 있네' 하고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도 있죠. 그렇게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다 보면, 글이 오히려 저를 다잡아주는 것 같아요.